"택시운전사"는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등의 연출을 맡은 장훈 감독의 "고지전" 이후 6년 만의 작품으로 2017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현장취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해외에 알린 외신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운전사 김사복, 그리고 광주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송강호가 택시운전사 만섭으로 출연하며, 토마스 크레치만이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로 출연합니다.
스토리
영화는 1980년 5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배경음악으로 흘러 나오며 시작됩니다. 여느 소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데모하는 대학생이 이해 안 되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 분). 어수선한 시국에도 사랑하는 딸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파란만장한 하루가 흘러갑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딸의 이마에 상처를 본 만섭은 주인집 아들이 그런 것을 직감하고 따지러 가지만 밀린 방세는 언제 줄 거냐는 핀잔만 듣고 돌아오게 됩니다. 딸을 재우고 하룻동안 벌어온 택시 요금을 계산하던 만섭은 라디오에서 전국 비상 계엄령이 발령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또 손님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한편 일본 도쿄. 독일 제1공영방송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 분)는 남한에 있었다던 어느 젊은 BBC 소속의 영국 기자에게서 "한국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를 직감한 듯이 다음 날에 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페터는 한국에서 아는 신문 기자인 이 기자를 다방에서 만나고, 이 기자는 보도지침이 작성된 수첩과 검열 때문에 한 면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 광주 신문을 건네주며 "광주시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혔고, 연락도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 말을 들은 피터는 광주로 향하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만섭은 동료 기사 겸 친구인 집주인 동수(고창석 분)가 사주는 점심을 먹던 중 "10만 원을 택시비로 내고 광주에 가겠다는 외국인 호구를 태운다"고 말하는 다른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만섭은 먹던 밥도 내버려 두고 재빨리 기사식당을 빠져나가버립니다. 국도극장 앞에서 피터와 이 기자를 만나게 된 만섭은 회사차가 전부 나가서 개인택시를 차출했다는 변명을 하고 피터를 택시에 태우고 광주로 출발합니다.
광주 근처에 도착한 만섭은 광주로 들어가는 통로에 바리케이드가 줄지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군인들이 전차와 트럭들로 길을 통제하고 있었고 자기보다 어린 중사가 삼촌뻘인 만섭에게 반말과 비속어로 윽박지르자 잔뜩 쫄아 곧바로 차를 돌렸고 페터는 "어디 가는 거냐"고 묻지만 만섭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광주에 들어갈 수 없다, 서울로 가자, 솔저 세이 광주 노(Soldier say Gwangju no)."고 설명합니다. 피터는 당황하지만 이내 "노 광주, 노 머니(No Gwangju, no money)!"로 대응합니다. 다른 길을 알아보던 만섭은 길에서 만난 어느 노인에게 광주로 들어가는 샛길을 듣게 되고 중간 검문을 특유의 기지로 통과하여 광주로 들어가게 됩니다.
드디어 도착한 광주. 거리는 인적이 끊겼고, 문닫힌 가게들과, 각종 플래카드, 곳곳에 부서진 물건들이 보이고, 바닥에 뒹구는 무수한 전단들과 돌조각들 등 황량한 풍경만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순간 뒤에서 대학생들을 태운 낡은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만섭의 택시를 가로막고 멈춰 서고 같이 멈춘 택시에서 페터는 내려서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합니다. 그때 나름 영어 좀 한다는 구재식(류준열 분)이 통역을 맡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함께 도청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의 시위현장을 보게 되고 행렬이 이동하는 금남로에서 촬영을 위해 근처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습니다.
페터는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고 뿌연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리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현장을 찍기위해, 시민들을 돕기 위해, 택시 승객을 말리기 위해 건물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아수라장의 현장에서 간신히 택시를 타고 빠져나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돌아가기로 약속한 7시가 되어 재식을 집에 데려다주고 출발하려 하지만 만섭의 낡은 택시는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결국 광주 택시기사들의 도움으로 수리를 하지만 서울로 갈 수는 없는 상황. 하는 수없이 둘은 태술(유해진 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던 중 갑자기 들려온 폭음과 총소리에 놀라 옥상으로 올라간 그들은 불타고 있는 광주 MBC를 보게 되고 사람들과 함께 현장으로 가 촬영을 하던 페터는 지나가던 보안사 사복조장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던 중 재식이 그들에게 붙잡히고 만섭과 페터는 천신만고 끝에 태술의 집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다음날 새벽,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만섭은 조용히 태술의 집을 나서 서울로 향합니다. 태술이 건네준 전라남도 번호판과 광주를 빠져나갈 샛길을 알려준 덕분에 그는 무사히 광주 밖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전쟁터가 따로 없던 광주와는 달리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들을 지나치며 만섭은 전남 순천시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차를 수리하고 딸에게 줄 선물도 사고 국숫집에서 국수를 시켜 먹던 중 국숫집 안의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왜곡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광주의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서울로 돌아가려던 만섭은 딸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하고 다시 광주로 향합니다.
다시 돌아온 광주에서 만섭은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재식을 보게 됩니다. 아비규환의 병원 현장을 본 만섭은 병실 구석에서 넋이 나간채 있던 페터에게 "이걸 찍어서 널리 알리는 게 당신 일 아니냐"고 이야기하며 카메라 필름을 손에 쥐어줍니다. 페터가 마음을 다잡고 병원을 촬영하고 있을 때 택시기사들이 들어와 금남로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있다고 외치고 그 소리를 들은 둘은 서둘러 금남로로 향합니다. 도착한 금남로는 참혹한 전쟁현장 그 자체였습니다. 그전까지의 최루탄 살포와 몽둥이질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이젠 아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저 눈에 띄는 모든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에게 그냥 무차별적으로 M16A1을 난사하고 쓰러진 시민들을 구하려는 사람들마저 사격하며, 심지어는 백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에게도 총격을 가했습니다.
페터는 이 아수라장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고 만섭은 광주 기사들을 도와 총 맞은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같이 구조를 돕던 최기자는 광주를 세상에 알려 줄 것을 부탁하며 어서 떠나라고 합니다.
만섭과 페터는 지금까지 촬영한 필름을 가지고 천신만고끝에 광주를 빠져나옵니다. 헤어지는 페터에게 만섭은 본명이 아닌 엉뚱한 이름을 알려주고 다음에 올 때는 한국어 좀 공부하고 오라고 농담을 하며 그를 배웅한 뒤 사랑하는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23년의 세월이 흘러 2003년 어느 겨울,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을 다시 찾은 페터는 한국에서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합니다. 페터는 수상 소감에서 만섭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섭 또한 2003년에도 여전히 택시 기사로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피터의 사진을 보며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던 친구였는데, 이렇게 보니 좋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바뀐 택시에도 여전히 룸미러에는 피터의 목걸이와 가족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 후 실제 위르겐 힌츠페터의 2015년 11월 인터뷰가 나옵니다. 김사복 씨를 그리워하며 "그의 택시를 타고, 같이 변화한 대한민국을 둘러보고 싶다"는 힌츠페터의 말과, 힌츠페터가 생전에 계속 김사복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그를 찾지 못 한 채 2016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역사적 배경
위르겐 힌츠페터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3년 5월 18일 일요일 저녁 8시에 KBS 1 TV를 통해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서입니다. 그는 학창 시절에는 의사를 지망하던 의학도였으나 미디어로 진로를 바꿔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했습니다. 1967년 초 당시 ARD의 유일의 동아시아 방면 지부가 있던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1969년 봄에는 베트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취재하다가 사이공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특파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한겨레 신문 기고에 의하면 그는 독일의 파울 슈나이스 목사 소개로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을 취재하기 위하여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그는 독일 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으로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습니다. 5월 19일 오전,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에 힌츠페터는 2시간 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는 21일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습니다.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은색 새한 레코드 로열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김사복은 영화와는 달리 호텔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안내했습니다.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으며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하면서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습니다. 이번에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힌츠페터는 두 번째 취재 자료를 독일로 보내고 5월 27일 세 번째로 광주에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끝난 뒤였습니다.
22일 일본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서독으로 보내진 힌츠페터의 필름은 22일 저녁 ARD가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8시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으며, 23일 잠입해서 찍은 필름까지 보태 후속 보도도 나왔습니다. 그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습니다.
힌츠페터 일행 외의 다른 외신 기자도 많이 왔지만 힌츠페터 일행은 최초로 광주에 잠입한 외신 기자이며 현재 남아있는 컬러 영상 자료의 대부분을 촬영했기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취재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한국에서 컬러방송이 시작된 것이 1980년 12월 1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약 6개월 이후라서 광주에 대해 취재한 국내 영상물의 대부분이 흑백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힌츠페터 일행이 광주에 오지 않았으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벌어졌던 신군부의 시민 학살이 묻히고 축소되었으며 흑백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 기자를 '항쟁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역사의 증인'이며, '계엄군', '광주시민'과 함께 항쟁을 구성하는 3개 주체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총평
관람객들의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모습을 제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보니, 고증 면에서 무난하고 관객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배우들이 대본의 감정 흐름 완급을 잘 조절하는 모습과, 중간에 웃음으로 눈물을 닦는 듯한 요소가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입소문을 탔습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송강호의 연기를 제재(題材)로 평을 싣기도 하였습니다.
영화적 장치들이 약간 티가 나게 분포되어 있다는 비판 아래, 전문가 평은 대체로 별 5개 만점에 3개 수준이었습니다. 힌츠페터가 한국 문화를 접하는 장면(갓김치를 먹는 장면 등)들에서 유치함이 느껴졌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주인공 만섭의 경우는 개인사적인 배경도 상세하게 공개되고 캐릭터의 변화도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지만 힌츠페터는 도입부의 '특종을 위해 위험한 현장에 뛰어들고 싶은 기자' 부분에서 더 이상 캐릭터의 발전이 없어 힌츠페터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창작 파트인 후반부 택시 추격 신은 감정선이 절정에 달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이긴 하나 이 장면이 꼭 필요했냐는 혹평도 있습니다. 개연성에서도 문제가 있을뿐더러 과도하게 극적인 이 장면이 영화에 오점으로 남았다는 평입니다.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마저 언급할 정도. 오히려 마지막 검문소 장면에서 "에이 저거 창작이네"라고 생각했지만 실화 기반이란 걸 알게 되어서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비인간적 진압이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부상자들을 열심히 병원으로 실어 나른 택시 기사들, 주먹밥을 나눠준 시민들이나 공짜로 기름 넣어준 주유소 주인 등 광주의 소시민들은, 겉보기에 특별하지 않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영웅적 투쟁을 이뤄냈고, 이 영화는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무엇보다도 철저히 소시민적 인물로 그려진 만섭의 존재가 이를 상징하며 이 택시 기사들이 총앞에 서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민들이 목숨 걸고 서로를 구하는, 실제로 있었던 행위들도 잘 표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해외 평은 메타크리틱 69점, 로튼토마토 신선도 96%에 평점 7.2점으로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수상내역
2018년
16회 피렌체 한국영화제(심사위원상, 관객상)
2017년
17회 디렉터스 컷 어워즈(올해의 새로운 남자배우상, 올해의 특별언급)
38회 청룡영화상(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한국영화 최다관객상)
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남우조연상, 영평10선)
4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사람상)
1회 더 서울어워즈(영화 남우주연상)
54회 대종상 영화제(최우수작품상, 기획상)
26회 부일영화상(최우수 작품상, 남우 주연상, 특별상-부일독자심사단상)
21회 판타지아 영화제(슈발누아경쟁 - 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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